내 소식

코드킴 [537476] · MS 2014 · 쪽지

2015-11-16 04:2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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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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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도 학문도 늘 이 두 단애(斷崖)의 절정을 가는 것 같다. 평온을 바라는 시민은 마땅히 기어 내려가서 저 골짜기 밑바닥의 탄탄대로를 감이 좋을 것이다.
- 김기림, '단념'

나도 두 단애의 절정을 걷고 싶었다.

그런데 가파른 낭떠러지 아래에서 올라온 손들이 나를 끌어내린다.

난 무기력하게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차라리 확 떨어질 용기도, 다시 기어 올라갈 용기도 없었다.

천천히 나를 끌어내리는 손에 모든 것을 맡기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내려온 흔적을 바라봤다.

사실은 흔적따위도 없다.

갑자기 생각이 들었다.

왼쪽 아래엔 탄탄대로가 있는데, 오른쪽 아래엔 뭐가 있나?

어차피 떨어질거면 남들이 떨어지지 않는 방향으로 떨어지고 싶었다.

그래서 다시 사력을 다해 단애로 올라섰다.

오른쪽을 보니 아무것도 없어 깜깜하다.

잠시 선실(禪室)에 앉아 과거를 돌아봤다.

돌아볼 것도 없었다.

그냥 오른쪽 비탈길로 굴러 떨어지기로 한다.

아쉬울 것도 없다.

내 자신을 낮추어 탄탄대로를 걸을 용기는 없다.

애초에 난 그 탄탄대로보다 더 낮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아니, 낮은 존재가 확실하다.

내겐 모든 것이 과분했다.

누군가는 탄생에서부터 모든 것이 정해진다.

세상의 모든 일은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프리카에서 태어난 아이가 기아로 죽는 것이 자신의 선택은 아닐 것이다.

나의 선택으로 벌어진 일이라면, 후회할 수 있다.

"나"의 선택이니 책임지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만 남의 선택으로 이렇게 된 것이라면,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나.

왼쪽의 탄탄대로에서의 생활, 단애에서의 아슬아슬한 생활 둘 다 할 용기가 없다.

그래도 오른쪽 비탈로 갈 용기는 있다.

왼쪽의 손들은 내가 조금만 왼쪽으로 움직여도 끌어 당길거다.

오른쪽으로 굴러 떨어진다.

아예 겁쟁이보단 반쪽짜리 겁쟁이가 더 낫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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