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소식

dsfadsfa [613598] · 쪽지

2015-11-05 15:09:41
조회수 1,281

연대생 여고생(2)

게시글 주소: https://dev.orbi.kr/0006741853

#2. 소주와 기억



혁주의 생일파티는 생각보다 오랫동안 이어졌다. 어느새 3차까지 간 우리는 더블더블로 자리를 옮겼



다. 나는 그렇게 남들과 잘 융화되고 어울리는 스타일이 아니라서 그런지 분위기에 완전히 녹아들지는



못하고 있다. 그래도 반 친구들은 친근하게 느껴진다. 마치 아주 오래된 친구들처럼. 그 술집에는 우리



말고도 다른 여러 학생들로 시끌벅적하다. 그들도 반 친구들이나, 선후배들이겠지. 저들은 언제나 함께



저렇게 몇년이고 관계를 이어갈 수 있을까? 나도 그럴 수 있을까?



한참 동안 술자리 게임을 하다가 지겨웠는지 지현이가 나를 가리키며 한마디 한다.



"야 우리 진실게임하자. 성민오빠부터 돌아가면서 하기! 물리면 소주 3잔 원샷!"



얘가 완전히 취했구나. 왜 하필 나부터 시작이니. 응?



아. 그러고 보니 나는 아직 진실된 사랑을 해본적이 없다. 아니, 고등학교때 사귀던 아이와 진실된 사



랑을 해보고 싶기는 했지. 그런데 그건 오직 나만의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결과적으로 내가 재수를 하



는 시점부터 그 아이는 더이상 나의 여자친구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나는 그렇게 실연당했다. 아



마도 내가 학원에 틀어박혀서 재수를 하고 있는 1년이라는 시간이 그녀에게는 너무 길었던 시간 이었



으리라.



외롭고 힘든 시간을 그녀에게 강요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오빠! 빨리 시작하라니깐? 자 우리반에서 누가 가장 마음에 들어?"



누가 마음에 드냐구? 솔직히 몇명 이쁜애들한테 관심이 가는건 사실이지. 그런데 내가 곧바로 들이대



거나 고백할 여유는 없거든. 그게 진실된 감정인지도 모르겠고. 난 한번 차인 이후로 진실된 사랑같은



거는 믿지 않는단 말이다.



나는 꽤나 진지하게 생각하는 척하다가 말문을 열었다.



"희진 선배. 누나 같구, 후배들 잘 챙겨주고, 성격도 좋잖아?"



주변에서 "오~"하는 소리와 함께 사귀라고 아우성이다. 부담없는 상대로 희진 누나가 가장 적절한거



같아서 선택한거지만, 그래도 누나는 괜찮은 여자다. 여자로서 끌리는 건 아니지만, 정말 호감이 간다.



나는 또 그런식으로 진실게임을 피해갔다. 나말고도 다른 친구들도 똑같이 마음에 드는 사람을 한명씩



말한다. 아까의 환호성이 똑같이 반복된다. "와~사겨라. 사겨라~!"



"야 그러고 보니. 너 소개팅한거는 어떻게 됐냐?"



내 앞에 있던 경석이 형이 묻는다. 내가 소주를 한잔 따러주려고 하니 됐다는 제스쳐를 보낸다. 약간 취



해 있어서 그런지 술을 더이상 마시지지 않으려는 모양이다.



"아 그냥,,잘 모르겠어요. 저도 감정을 잘 모르겠고 상대방도 저를 그다지 좋아하는거 같지 않고.."



소개팅은 왠지 내 적성에 맞지 않았다. 뭔가 잘 완성된 대본을 가지고 가서 연기하는 듯한 느낌이랄까.



어떻게 저 여자애한테 다가가야하지? 내가 누군지 어떻게 알려줘야 할까? 한 두번 만나서 마음에



든다는건 또 뭐고. 그냥 확 끌린다는거? 하드웨어가 마음에 든다는 거야?



시간은 벌써 새벽 2시에 가까워졌다. 우선 여자애들을 집에다 보내주고 좀더 시간이 지나자 남자들만



서너명 남는다.



"성민아 오늘 니네 집 신세좀 지자. 우리 아버지한테 술취해서 들어가다가 또 걸리면 난 죽음이야."



신촌 한복판에 있는 내 하숙집은 완전히 여관이나 다름없다. 그닥 까칠한 성격이 아닌 내가 그걸



거절 할리는 없다. 게다가 아버지한테 죽는다고 하지 않는가.



사실 나는 아버지가 없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덕택에 어머니 혼자서 외동아들인 나를 키우느라고 정말 고생하셨다. 아버지는 어떤 느낌일까. 차라리



아버지한테 죽도록 혼나봤으면 소원이 없겠다.



어느새 나를 포함해 3명의 남자들이 내 하숙집으로 들어왔다. 경석이 형이 호주머니를 뒤적이다가 난



감한 표정으로 나에게 묻는다.



"아, 술집에다 라이터랑 담배놓고 왔나보네. 야 너 담배 안피우지? 담배없냐?"



그때 오늘 있었던 한편의 신선한 충격이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그러고 보니 한 여고생한테서



라이터랑 담배를 빼았아버린 꼴이 되었네. 완전히 나쁜놈 된거잖아 이거?



"형 저기 서랍에 라이터랑 담배 있어요. 던힐 라이트 괜찮죠?"



"땡큐지 그럼"



경석이 형은 서랍을 열고 담배랑 라이터를 집어든다.



"이야, 이거 라이터 되게 좋은거 같은데. 이거 어디서 났냐? 담배도 안피우는 녀석이"



"그럴 일이 있었어요."



나는 아까 생각이 나서 씩 웃으며 그렇게 대답했다. 경석이 형은 담배랑 라이터를 들고 현관 밖으로



나간다. 아마 한두대 정도 피우고 들어올 모양이다.



아까 낮에 봤던 여고생 모습이 다시 떠오른다. 그러고 보니 꽤나 이뻤던거 같은데. 왜 하필 여기서



담배를 피우려 하고 있었을까.....?



나는 그 여고생이 내 인생에서 어떤 의미를 차지하게 될지 따위는 잘 알지 못했다. 어느새 여고생은



머리속에서 밀려나고 나는 골아 떨어진다. 내일 채플은 못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상관없다.



어린 내가 아버지와 놀고 있는 꿈을 꾸고 있다. 수채화 같은 푸른 언덕에서다.








































#3. 인연이란거 안믿어



내가 왜 밤 10시가 돼서야 집으로 돌아갔는지는 기억이 정확치 못하다. 아마도 근처 술집에서 친구들과



어울려서 놀다가 되돌아오는 길이었으리라. 늦게 일어나서 채플도 들어가지 못했을 뿐더라 연이틀이나



술을 마셨기 때문에 상당히 피곤했다. 게다가 내일 9시에 첫수업, 나는 주저하지 않고 근처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어서오세요."



여명808을 하나 집어든다. 이걸 마시면 다음날 숙취가 덜한 느낌이어서 종종 구입하곤 했다. 새로 일하



기 시작한듯한 생긋웃는 인상의 여자 아르바이트생이다. 다소 인위적인 친절함으로 바코드를 찍으면



서 말한다.



"5000원 입니다."



나는 천원지폐 4장에 500원 동전 2개를 건네주고 편의점을 나선다.



"안녕히 가세요."



마찬가지로 다소 인위적인 인사를 받으면서 나는 하숙집으로 걸어갔다. 빨리 샤워하고 자고 싶은 생각



뿐이다. 별 생각 없이 대문을 연다. 하지만 다시 한 번 놀라고 만다. 누군가 있다.







나는 정말 당황했다. 밤 10시도 훌쩍넘은 시간에 얘가 여기 왜 있는 거지? 아니, 그보다도 더 당황스러



운건 저 여학생의 모습이다. 파묻은 고개를 들자, 완전히 눈물로 범벅이된 얼굴이 드러난다. 머리카락



몇가닥이 그 눈물에 붙어있다. 한참을 거기서 울고 있었던게 분명하다. 나를 발견하자 원망의 눈길이



가득해진다.



"야. 너...거기서 뭐하고 있어? 지금이 몇신데..."



"빨랑 내놔요. 그거! 빨리요!"



여고생은 다시 눈물을 터뜨리면서 나를 몰아세운다. 펑펑 운다는 표현이 더 맞을듯 싶다. 나는 더욱 당



황한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 내가 왜 여고생 한명을 이렇게까지 울리고 있는거지?



"야.....너 왜이래? 응..?"



"빨리 달라고요. 라이터 빨리 줘요!"



저 여고생의 펑펑우는 얼굴과 아까 편의점에서 본 아르바이트생의 생긋 웃는 얼굴이 오버랩된다.



이거 참, 극과 극의 조합이로군.



나는 우선 그 여고생을 진정시켜야 겠다고 생각했다. 벌써 1층에 있는 한 하숙생이 갑작스런 여자의



울음소리에 놀라서 현관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어 쳐다본다. 이거..완전 동네 망신이네.



"야, 그렇게 막무가내로 울면 어떡해? 줄게, 줄테니까 좀 울지좀 말아봐."



내가 다독이듯이 말하자 그제서야 여고생은 좀 수그러든 듯 했다. 나는 왜그렇게 흥분했는지 자초지종



을 듣지 않을 수 없었다.



"안좋은 일 있어서,,,,담배 한개만 피워보려고 아빠 서랍에서 몰래 가져온거란 말이에요. 근데 아저씨



가 다 가져가 버렸잖아요. 라이터 결혼할때 아빠가 엄마한테 받은 정말 중요한 물건이란 말이에요.



괜히 내가 몰래 가져간거 걸리기나 하구. 라이터도 뺐기구. 씨발...흑흑"



아,,,거참. '씨발'이란 말은 안붙였으면 더 좋았을 것을...그렇게 안생긴 애가 말버릇 정말 안좋네.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러게 누가 아빠꺼 훔쳐다가 담배 피우라니? 응?



"야 그럼, 어제 내가 가져갈때 바로 얘기를 하지. 언제 부터 여기 있었던 거야?"



"아저씨가 뒤도 안돌아보고 홱 들어갔거든요? 글구 저 6시에 학교 마치자마자 바로 와서 기다렸거든



요? 시간 없어요. 빨리 라이터나 주시죠?"



진짜 까칠하네. 헉, 그러고 보니 4시간이나 여기서 죽치고 기다렸던 거야? 좀 일찍 들어갈 걸 그랬나.



"알았어. 나 따라와. 내 방에 있으니까 줄게."



그런데 그 여학생은 잠시 머뭇거린다. 그제서야 나는 깨닫는다. 아무리 만인이 드나드는 성민여관이라



고 해도, 내가 너무 개념이 없었군. 누군지도 모르는 '아저씨' 집에 여고생이 따라 들어가기는 무리지.



"아니, 그냥 내가 가지고 오는 편이 빠르겠다. 10초만 기다려."



나는 내방으로 뛰어가서 서랍을 열었다. 앗. 그런데 라이터랑 담배가 없다. 아! 경석이 형! 어제 일이 떠



오른다. 형이 어제 우리집에서 그 라이터를 빌려서 담배를 피우고 무의식중에 자기 호주머니에 넣었음



에 틀림없다. 이런,, 난감하네. 저 까칠한 여고생한테는 뭐라고 말하지? 쟤 또 울고불고 난리치는거 아



니야? 아씨..우선 입부터 틀어 막아 버릴까?



나는 면목없다는 표정으로 그 여학생이 있는 곳으로 다시와서 차근차근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내일



그 형한테서 라이터를 받아서 줄테니 걱정하지 말고 좀 돌아가 줄래? 대충 이런 식이었다.



다행이 다시 울고불고 하지는 않는다. 그러다가 내 손을 유심히 쳐다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내손에



그때까지 들려져 있던 여명808이다.



"아....진짜 가지가지한다. 짱나....아저씨. 나 지금 목마르고 짜증나서 죽을거 같거든요? 내일 무슨일이



있어도 라이터 주세요. 네?"



그러더니 내 손에 있던 여명808 캔을 홱 가져가더니 내가 뭐라고 할 틈도 없이 캔뚜껑을 따서 벌컥벌컥



마신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아버릴뻔 했다.



"캑캑,,,, 아 씨. 진짜. 이거 뭐야! 무슨 맛이 이래!"



그럼,,, 그게 캔커피라도 되는 줄 알았니?



"아니 요즘에는 한약도 팔아요? 왜 이딴 걸 돈주고 사서 마셔요? 아 짱나."



이제 별거가지고 다 시비구나. 숙취해소용 음료라는 걸 설명할 기력도 없다. 이게 5000원이나 한다는



걸 알면 기절을 하겠군.



"자요. 아저씨나 마셔요. 저 갈테니까 폰번호 불러요."



안마셔. 니 입에 들어갔다가 뿜어져나온거 다 봤거든.



나는 폰번호를 알려준다. 여고생은 내 폰에 전화를 걸고 나서 인사도 없이 되돌아 나간다.



"야. 잠깐만, 목마르다며.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니까 내가 음료수 하나 사줄게 들고가."



"됐어요. 무슨 점봐요? 인연같은거 안믿거든요?"



휙하고 지나가는 여고생을 바라보며 나는 정말 피곤하다는 생각이 든다. 살다보니 별 희안한 일도 다



있구나. 인연을 안믿는다고? 그래, 나는 진정한 사랑을 안믿으니까 이거 완전 최상의 조합이로군.



내일 언제 또 라이터를 돌려주지...귀찮게 됐네.



나는 여명 캔을 분리수거 통에다 버리고 들어간다. 휴대폰에는 익숙하지 않은 번호 하나가 찍혀 있다.



나는 주저없이 '진상녀'라고 번호를 등록한다.


























#4. 회상, 2008년 9월 17일, 서울



내가 우리 동화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몰래 훔쳐봤었더라면, 시간을 되돌려 하숙집 앞에서 너의 라이터



와 담배를 빼았을 수 있었을까? 너는 그렇게 내 집앞에서 4시간 동안 기다리며 나를 원망하고 몰아세



울수 있었을까?



2006년 여름즈음에 우연히 만났던 나와 너의 이야기는, 단지 쓸쓸한 기억으로 잊혀지고 말 것인지.









#5. 비와 그녀



강의실 밖에는 비가 아주 조금씩, 추적추적 내리고 있다. 오전만 해도 밝았던 교정이 우울하다 싶을 만



큼 구름에 둘러싸여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오늘 아침에 우산을 챙겨온터라, 큰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그래도 내가 비내리는 날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이렇게 우울한 날씨에 고등학교때 사귀던



그녀에게 이별을 통보받았기 때문이다. 안좋은 예감은 빗나가는 적이 없다. 특히나 이렇게 비오는 날



씨에는 좋은 기억이 별로 없다.



'미안해...성민아. 그런데 나 자신이 없어. 내가 1년이라는 시간동안 기다릴 수 있을지, 다시 공부해야하



는 너한테 짐이 되지는 않을지. 우리 친구로 지내면 안될까? 나는 그러고 싶어.'



그래, 내가 너한테 무슨 말을 해줄 수 있겠냐? 수많은 여자애들이 그렇게 가고 싶어하는 유명한 여대잖



아. 너도 이제 신입생인데 남들처럼 미팅도 하고 대학생들한테 고백도 받고 그런 특권쯤은 있어야 겠



지. 나는 너를 못 붙잡아. 그러니까 선택은 너가 했어야 했어. 왜 울어? 니가 울 이유는 없잖아. 차라리



내가 제발 떠나지 말라고 무릎꿇고 울면 모를까.



갑자기 민망하다 싶을 만큼 엄청난 휴대폰 진동이 귓가를 때린다. 책상 위에 폰을 그냥 올려놨던 내 잘



못이다.



교수님은 짐짓 모르는 척 수업을 계속 진행하고 몇몇 주위에 있던 학생들이 이쪽을 쳐다본다. 나는 서



둘러 무음모드로 바꿔놓은 다음 문자를 확인한다.



[저 지금 학교 끝나고 아저씨네 집앞으로 가고 있는 중이에욤. 한 20분 뒤쯤 도착할 듯]



너도 참,,, 분위기 깨는데는 선수구나. 왜 얘만 등장하면 늘 똑같던, 늘 그랬던 분위기가 한번에 뒤집히



지?



[응. 나도 그때쯤에 수업 끝나서 바로 갈꺼야. 없어도 잠깐만 기다려]



딴 생각하고 있는 사이에 벌써 교수님이 수업을 마무리 짓고 있다. 종합관 건물 밖으로 나가니 아까보



다 빗줄기가 훨씬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반 친구들 몇녀석이 어깨를 툭치며 말한다.



"성민아, 위닝하러가자"



"야, 오늘은 안되겠다. 누구 만날사람이 있어서 말이야."



"오~ 누구? 여자냐? 여자?"



그러고 보니, 성별로 따지면 여자는 여자로군. 여자 만나러 가는게 맞기는 맞네.



친구들보다 앞서서 걸어가고 있는데. 문자가 한통 더 도착한다. 여고생으로 부터다.



[지금 맥도날드 앞에 있는 지하철 출군데요..비와서 못나가고 있어요ㅠ 이쪽으로 좀 와주면 안돼요?]



우산 안가져 왔니? 준비성 하고는,,,귀찮긴 하지만 안될 건 없지. 나는 간단하게 답문하고 3번 출구쪽으



로 걸어간다.



비가 내리지만, 3번출구 앞은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다. 다들 만나면 행복한 연인을 기다리고,



친구를 기다리고 있겠지. 나는 뭐지? '내가 빼았아간 라이터 받으려고 기다리는 애'를 만나러 가는 거



구나. 진짜 이건 정말이지 별로다.



그 여학생을 찾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나는 휴대폰 화면을 보면서 조용히 서있는 그애한테 다



가가서 어깨에 살짝 손을 댄다.



"어, 안녕하세요. 우산을 안가져와서요. 미안요."



미안하다구? 나는 왜 비오는 날에 여자들한테 미안하다는 소리밖에 못들을까. 잠깐만, 그러고 보니 니



가 미안할건 또 뭐냐? 내가 라이터 가져가서 니가 몇시간 동안이나 기다리고 몇번이나 신촌으로 와야



했던건데.



다시 보니 어제 흥분했던 모습에 비하니까 많이 차분해진 모습이다. 그래, 차분해지니까 좀 낫네.



나는 갑자기 미안한 마음이 든다. 어제처럼 까칠하게 대들었다면 내가 미안하진 않았을 텐데.



"야, 너 저녁 먹었어? 내가 미안한 것도 있고,,, 밥사줄게. 먹고가."



여고생은 의외의 제안이었던듯, 잠시 고민한다. 그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친구들이랑 저녁을



먹기로 했었는지, 친구에게 전화를 건다.



"야 오늘 니들끼리 그냥 먹어. 나 공짜로 먹는다. 밥. 응? 아 그냥 아는 오빠랑"



그러면 그렇지. 니 핵심은 바로 '공짜밥'이었구나. 이거 나중에 대학들어가면 된장포스좀 풍기겠는데?



아는 오빠라.. 그래 어떤 의미에서 '아는' 오빠인건 맞지. 내가 '여자'만나러 가는거 처럼.



나는 파스타 투웰브로 가려고 마음먹고 발걸음을 돌린다. 그때 뒤에서 여고생이 나를 부른다.



"나 우산 없다니깐요."



아 참, 그렇지. 같이 쓰고 가야겠네. 내가 먹자고 했으니, 우산도 씌워주는게 맞지. 근데 뭔가 사모님



모시고 가는 최기사가 된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야 니가 약간만 앞으로 가. 내가 씌워줄게."



막상 같이 우산을 쓰고 가니까 분위기가 좀 어색하다. 아직 어려서 그런가. 화장도 거의 안한거 같은데



피부는 좋네. 키는 한 163정도? 근데 지금 내가 뭐하고 있는거지? 나이 먹어서 주책이다.



비가 와서 그런지 파스타 투웰브에는 평소보다 사람이 더 많다. 여고생이 메뉴판을 뚫어져라 쳐다보다



가 나한테 묻는다.



"뭐가 맛있어요? 해물 소스? 토마토 소스?"



그냥 아무거나 시키지. 나는 화이트 소스가 좀 느끼하기는 한데 한번 먹어보라며 주문해준다. 그런데



막상 그렇게 마주 앉아 있으니까 정말 할 얘기가 없다. 이거 무슨 소개팅도 아닌데 왜이렇게 뻘쭘한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너랑 나랑 공감대를 형성할만한 무언가를 공유하지 못하고 있구나.



아! 이름. 서로 이름도 모르고 있네. 그런데 나는 방금 니 이름을 알았어. 니 가슴에 붙어있는 명찰에서.



'손시연'



내가 명찰을 뚤어져라 쳐다보고 있으니까 어색했는지, 여고생이 가슴 언저리를 툭툭털며 나한테 물었



다.



"뭐 묻었어요? 왜 계속 이쪽 쳐다봐요?"



잠깐만. 목소리 뉘앙스가 "이 변태야 왜 계속 가슴 쳐다봐!" 대충 이렇게 들린다? 나 변태 아니거든, 니



가슴 쳐다 본것도 아니고. 어린애 가슴같은거 관심없거든?



"너 어디 고등학교야? 몇학년?"



"S고등학교 2학년이요. 아저씨는 대학생이에요? 어디? 연대 서강대?"



"연세대, 나 신입생이야."



"오~! 연세대. 공부 잘했나 보네. 나 연세대 들어가면 아빠가 완전 좋아할 텐데."



공부? 내가 경쟁상대로 생각한 애보다는 못했어. 모의고사랑 내신 10번 시험보면 8~9번은 그녀석이



점수가 더 높게 나왔거든. 그게 늘 스트레스였고. 그래도 다른 사람들 한테는 공부 잘한다는 소리는 많



이 들었지. 근데 그놈의 경쟁의식때문에 늘 불만족 스러웠어. 성적에 있어서는.



"그럼 아저씨는 고등학교때 모의고사 다 1등급 받고 그랬겠네요? 반에서 1등도 하고? 나는 반에서 15



등안에 겨우 드는데."



애는 애구나. 하기야 저때 관심사가 다 그렇지 뭐. 너는 몇등급이냐 전교 몇등이냐 이런거.



"근데 너 아까부터 왜 계속 아저씨 아저씨 거려. 나 86년생이거든? 너 몇년 생인데?"



"저 빠른 90이거든요? 와 86년생이래. 완전 아저씨다 아저씨."



헉, 90년생. 시간의 갭이 있기는 있다. 나는 올림픽보면서 걸음마 뗐는데, 너는 그때 이 세상에 존재하



지도 않았구나. 어떻게 보면 아저씨가 맞기는 맞네. 근데 꼭 그렇게 불러야돼? 완전 노친네된 느낌이라



구. 그래도 생각보다 분위기 안 어색하고 괜찮아졌네.



분위기 안어색해져서 좋기는 한데 너랑 나, 진짜 공통분모가 하나도 없다. 이름도 달라, 성격도 달라,



나이도 차이나, 성적도 달라. 이건 뭐 공유할게 진짜 없네.



맞다. 라이터 돌려주기로 했지. 까먹을뻔 했다.









"라이터 받어."



"아! 깜빡할뻔 했다. 바본가봐 바보."



나야 그렇다치고, 얘는 왜이래? 라이터 받으러 온애가 그새 그걸 까먹니? 어제 그렇게 라이터 내놓으라



고 울고불고 난리 부르스를 추더니.



"근데 이거 되게 비싼건가 보다? 이게 그렇게 중요한 거였어?"



그때 갑자기 여고생의 얼굴이 완전히 울상이 된다. 어? 얘 또 우는거 아니야? 분위기 왜 이래?



"나,, 아빠랑 여동생이랑 셋이 살거든요. 엄마가 나 중학교때 돌아가셨어요. 그거 엄마가 아빠한테 젊



었을때 사준거라, 아빠가 엄청 아끼는 거란 말이에요."



아 그런 사정이 있었구나. 미안 미안. 이런 반응을 바라고 말한게 아닌데. 아 진짜 이런거 싫다. 나는 왜



누가 내 앞에서 울려고 하는게 정말 싫지? 나까지 슬퍼지려고 해. 아무리 봐도 너 진짜 애는 애다. 어제



는 그렇게 까칠하더니만,,,어떻게 갑자기 이렇게 불쌍한 울상을 짓냐? 너 이런 이미지 아니잖아?



나는 빨리 대화의 화제를 바꾼다.



"되게 중요한 거였네. 내가 진짜 미안. 스파게티는 어때? 맛있어?



"조금. 솔직히 약간 느끼한거 같은데 먹을만은 해요."



나는 그때 다시 깨닫는다. 얘는 엄마가 없구나. 나는 아버지가 없는데. 부모님 중에 한 분이 안계시는



거, 이것도 공통분모라면 공통분모네. 너도 나와 같은 느낌의 슬픔 하나는 가슴 속에 공유하고 있는거



니까. 스파게티 다 먹을 즈음에 겨우 하나 찾았구나. 공통점.



"아저씨 이름 뭐에요? 내 이름은 아까 명찰볼 때 봤죠?"



응. 손시연 이잖아. 너 아까 내가 명찰보고 있는건지 알았구나? 나혼자 괜히 변태로 몰린 것처럼 오버



한 거였네.



"나 최성민."



"휴대폰 이름 바꿔서 저장해야 겠다. 이름 몰라서 '이상한 아저씨'로 저장해 놨는데."



이....이상한 아저씨! 이 자식이 사람을 가지고 노네. 하기야, 근데 이거 어쩌나. 내 폰에 너는 '진상녀'



라고 등록돼 있는데? 이상한 아저씨와 진상녀와의 만남? 진짜 그림 안나온다. 그지?



나 역시 이름을 바꿔 저장하려는데, 휴대폰이 없다. 아마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가방속에다 넣어뒀나 보



다. 가방을 뒤적거리는데 여고생이 뭔가 발견한 듯 말한다.



"어! 유리알 유희네! 나 그거 읽고 독후감 써서 내라고 선생님이 그랬는데."



니네도 이거 독후감 쓰니? 또 하나 공통점 있네. 나도 연대에서 이거 독후감 쓰라고 해서 썼었거든.



헤르만 헤세. 이름만 생각해도 너무 복잡하다 지금.



"그거 나 빌려줘요. 아싸 책값 벌었다."



공짜 엄청좋아하는거 같애 너. 밥먹으러 따라온 목적부터가 그렇지? 이제 책까지 공짜로 빌려가려고?



"이거 그냥 줄게. 너 가져."



"오~ 쿨한 척. 빌려갔다가 나중에 시간 남으면 돌려 줄게요. 고마워요. 땡큐."



책을 책가방에 집어 넣으면서 우리 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빗줄기는 많이 약해졌다. 나 혼자 다니면



그냥 우산 안쓰고 다닐텐데. 얘 때문에 안쓸 수도 없고. 그냥 씌워주기로 한다. 조금 걷다보니 벌써 3번



출구 앞이다.



"야, 너 지하철 역에서 집 가까워? 많이 걸어가야돼?"



"성수에서 내려서 한 15분쯤? 왜요?"



"그럼 너 이거 가져가서 쓰고가. 3천원주고 산거니까 그냥 가져. 난 여기서 5분이면 가니깐."



"안그래도 되는데, 괜찮은데..,"



나는 우산을 그 여고생 손에 쥐어주고 지하철로 보냈다. 아직 어려서 그런지 남자의 이런 호의에는 별



로 익숙치 않은거 같다.



"그럼 갈게요. 잘가요."



이번에는 인사도 없이 휙 지나가지는 않는군. 나는 아주 조금씩 내리는 비를 맞으며 하숙집으로 걸어간



다. 비오는 날이 꼭 짜증나고 우울하지만은 않구나.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든다.

0 XDK (+0)

  1. 유익한 글을 읽었다면 작성자에게 XDK를 선물하세요.

dsfadsfa [613598]

쪽지 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