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위와 사실에 대한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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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위는 어디에서 근거하는가?
당위는 흔히 ‘~해야 한다’, ‘~하지 말아야 한다’의 형식으로 나타나는 도덕적 요구를 나타낸다. 그렇다면, 당위는 어떤 과정을 통하여 정당화될 수 있을까? 만약 모든 명제를 당위와 사실의 두 측면으로 구분한다면, 당위명제의 근거 역시 당위명제 또는 사실명제일 것이다. 그렇다면, 각각의 근거에 의해 당위명제가 형성되는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자.
- 1. 사람을 죽여서는 안된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도덕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 ‘사람을 죽여서는 안된다’라는 당위명제가 ‘사람을 죽이는 것은 도덕적이지 않다’라는 당위명제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으나, 정작 근거가 되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도덕적이지 않다’라는 명제는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 당위명제가 당위명제를 타당하지 않게 뒷받침하는 사례 (선결 문제 요구의 오류)
- 2. 동물들은 모두 적자생존의 법칙에 의해 살아간다. 따라서 인간도 적자생존의 원리에 따라 약한 자는 도태되는 것이 마땅하다.
-> ‘동물들은 모두 적자생존의 법칙에 의해 살아간다’라는 사실명제를 ‘인간은 적자생존의 원리에 따라 살아야 한다’라는 당위명제의 근거로 들었으나, 두 명제의 논리적 관계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타당하지 않다.
=> 사실명제가 당위명제를 타당하지 않게 뒷받침하는 사례 (자연주의의 오류)
1, 2는 각각 당위명제와 사실명제가 논리적 결함을 가진 채 당위명제를 형성하는 사례이다. 그런데, 우리가 갖고있는 당위명제 각각의 근거를 뜯어보면 대개 위의 두 잘못된 사례와 비슷한 점을 발견하게 되기 마련이다. 오류 없는 당위 명제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수많은 철학자들은 이러한 점을 깨닫고는 일생의 어느 지점에서 한때 회의주의에 빠지게 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당위명제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해야 한다’, ‘~해서는 안된다’라는 규칙들 없이 어떻게 우리가 살아갈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결국 실용적 필요에 의해 당위명제를 받아들이게 되는 것인데, 이를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을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게 된다. 역사적으로 많은 문화권에서 종교를 근거로 당위명제를 정당화하곤 했으나, 탈종교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21세기에는 그것이 널리 수용될 수 있는 방안은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요컨대 가장 먼저 떠오르는 대안은 실용적 필요 자체를 당위명제의 근거로 제시하는 것이다. 이는 흔히 다음과 같은 구성을 지닌다.
- 3. 사람을 죽이는 것이 도덕에 의해 금지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사는 사회는 몹시 위험하고 불안정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각 개인의 안정적으로 생존하고자 하는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는 사람을 죽이는 것을 비도덕적인 것으로 규정해야만 한다.
3은 앞서 살펴본 1, 2와는 달리 논리적으로 타당해 보인다. 이러한 대안은 사실명제를 통해 우리의 규범을 정당화하려는 시도인데, 뒷 문장이 당위보다는 사실의 특성을 지닌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이 논증은 크게 ‘인간은 생존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을 금지해야 한다’, ‘따라서 인간은 다른사람을 죽이는 것을 금지한다’라는 세 가지 사실로 이루어져 있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에서 나온 것 같은 유물론적 관점이나, 진화심리학의 관점, 메타윤리학의 관점은 이러한 접근법과 맞닿아 있다.
한편, 이는 우리가 살인을 비도덕적인 것으로 규정한 사실에 대한 타당한 기술로 보이지만, 당위를 사실로 환원하는 접근은 당위명제가 가지고 있는 생산적인 속성을 구현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가령 역사에서 한 국가가 다수 구성원의 필요에 의해 일부 구성원에 대한 차별과 배제를 도덕적인 것으로 정당화했다면, 환원적 접근은 이러한 사실을 사실로서 올바르게 분석할 수는 있으나 그러한 사실의 비도덕적인 지점을 지적하거나, 그러한 사실을반복하지 않기 위한 당위를 제시하기 어렵다. 또, 환원적 접근은 현실에서 상이한 두 필요가 충돌하는 경우에 대한접근도 어렵다. 가령 사회 구성원들이 자유를 필요로 하면서 동시에 평등을 요구한다면, 자유를 증진시키되 평등을 저해하는 정책과 그 반대의 정책 중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하느냐에 대한 당위적 물음에 답변하기가 곤란하다는것이다.
상당수의 경제학자나 공리주의자들은 위의 문제에 대하여 자유를 증진시키는 정책의 편익과 평등을 증진시키는정책의 편익을 비교하여 더 나은 것을 고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각각의 가치가 사람들에게 주는 양적 만족감을 통계적 방법으로 계량할 수는 있겠으나, 실제로 모든 가치가 정확히 측정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다수의 편익을 최대한 증진시키는 것이 옳다’라는 명제 역시 당위의 속성을 지닌 주장에 불과한 것이며, 이는 ‘다수’의 범위를어디로 규정하느냐, ‘편익’을 어떻게 측정하느냐에 대한 윤리학적 문제가 존재한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도덕적 가치 그 자체에 대하여 논할 필요가 있으며, 당위를 당위 자체로 다뤄야 할 필요에 논리적으로 귀착하게 된다. 이로써 가장 비생산적인 것처럼 보이는 추상적인 논의들이 생산적인 지위에 도달하게 되는것이다. 당위를 당위로 다룬다는 것은 물론 수많은 어려움이 있다. 담론이 일관된 방법론 없이 비선형적으로 나아가는 경우가 빈번하며, 당위를 다루는 인문학자들의 부족한 경제적, 과학적 지식으로 인해 당위로써 잘못된 사실을 구성하는 도덕주의의 오류가 더러 발생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떠한 학문이 마주한 어려움이 있다고 해서 그 학문의 가치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당위를 다루는 것은 학문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주장 역시 빈약한 논리의 당위를 주장하는 것에 불과하며, 이러한 지적은 어떤 학문이 잘못된 사실을 주장하는 개별 사례에만 제한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 사실과 당위를 적절하게 관계 지으면서도, 당위를 통해 당위를 논하는 접근이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일부 분야에서 분투하고 있는 과제이다. 앞선 필요에 당위에 대한 이러한 학문은 과학적 사고가 발달하고 이성이 감성보다 우월한 것으로 추앙되는 21세기에도 명목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Ps. 오늘 오르비를 보고 생각이 나서 갑자기 적어본 글이지만, 오르비에서 주요하게 다뤄진 쟁점에 대한 내용도 아니고 특정인에 대한 저격도 아닙니다. 평소에 하던 생각을 적어본 것이며, 더 생산적인 이야기를 위해 색다른 관점을 제시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여 올리는 개인적인 생각이니, 마찬가지로 제 글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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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ㄱ
당위에서 당위를 도출하는 건 학문일 수는 있겠지만, 과학은 아니겠지요.
사회과학의 측면에서 바라볼 때 말씀이신 것 같습니다.
넵 저도 과학은 경험된 것을 기반으로 사실을 다루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3번째가 맞죠
와우.. 비문학 독해를 잘하는 분들은 많지만 또 작문을 잘하는 건 더 드물던데 글을 잘 쓰시네요ㅎㅎ
글 잘 쓰는 요령이 뭘까요? 필사..?
필사도 많이들 추천하시던데 저는 그런 귀찮은 거는 잘 못해서…ㅋㅋ 그냥 논리적인 글을 많이 읽는 편인데 거기에 대해서 자기 생각을 정리하는 연습을 많이 해보면 좋은 것 같아요!
혹시...ㅠㅠ qna 정리해서 올려주신다고 하셨던거 언제쯤 올라올까요 ㅠㅠ
정리중입니다 ㅠㅠ 조만간 도움이 되는 형태로 올려볼게요.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페미니스트들이 진화심리학을 공격하는 현상이 생각나네요. 어느 분야나, 과격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정당하다고 믿는 ‘당위성’이라는 틀 안에 모든 것을 맞춰 넣으려고 하죠. 본문 내용과는 결이 좀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또 다른 케이스로는 경제 발전을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들이 기후변화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부정하는 사례가 있겠네요. (그래야 죄책감 없이 아마존을 불태울 수 있을 테니..)
3번 사례에서 "각 개인의 안정적으로 생존하고자 하는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는"이라는 부분이 이어지는 "사람을 죽이는 것을 비도덕적인 것으로 규정해야만 한다."를 마치 사실처럼 보이게 하지만, '도덕적 당위'의 근거로는 부족한 자연주의의 오류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는 '~하려면 살인을 하면 안된다'라는 사실적 결론이 유효한 것이지, '살인은 나쁘다.'처럼 비도덕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당위성이 유효하진 않으니깐요. 또 자세히 살펴보면 '개인의 생존 욕구'를 추구하는 것이 도덕적 가치 판단의 기준이 될 수 있다는 전제를 내포하고 있는데, 이 구조 또한 자연주의의 오류입니다. 도덕이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어떤 사실들과도 다른 관점에서 출발하는 문제입니다. 만약 도덕이 어떤 사실들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 도덕은 더이상 논의할 필요도 없는 절대적 진리값을 가지고 있겠지요. 그러나 '개인의 생존 욕구 추구' 또는 '사회의 안정'과 같은 것들이 당위를 갖추기엔 그것은 다수의 필요지, 전체의 규범이 아니기에 끊임없는 논박과 담론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의무론, 공리주의 등과 같은 것처럼 자연적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규범적 전제가 포함되어야만 비로소 오류가 아니라 윤리 이론으로서 정당화 가능한 가치를 지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덧붙여 타당한 형식이 당위를 설명하지는 못하며, 그 논증이 만약 건전하게 당위를 설명한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진리입니다. 하지만 인류는 아직 '건전한 당위 논증', 즉 진리를 찾아내지 못했고 현재까지로서는 당위 명제를 정당화하려면 자연적 사실에 근거하지 않는 규범적 전제가 수반되어야만 한다고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