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수찬가 -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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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주가 끝나간다. 금요일, 역에서 지상으로 올라와 쐬는 이른 아침 공기는 가습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축축한 그것과
비슷했다. 마이맥은 교대역 한 정거장 전인 서초역에서 내려 걸어오는 게 더 빠르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등원할 때는
서초역에서 내려 걷는다. 집에 갈 때는 서초에서 타는 게 약간 무리인 것이, 교대역에서 이미 넘칠 정도로 사람들이 탄다.
그래서 집에 갈 때는 한 정거장 더 가는 것을 감수하고 교대역에서 탄다.
일곱 시 오 분 쯤 교실에 도착하니 두 명이 있다. 한 명은 비대칭 컷을 한 앞머리에 귀에 피어싱을 한, 덩치는 작지만
상당히 포스 있는 모습이다. 그리고 삼수생이다. 둘째 날인가 담임선생님이 삼수 이상의 학생들을 가장 먼저 상담했다─라기
보단 군기 형성에 노력하라는 얘기였다고 했다. 덕분에 불려나가지 않은 오십여 명의 현역들은 서로 동갑임을 알게 되었고,
열 명 남짓한 형, 누나들 얼굴도 미리 파악할 수 있었다.
다른 한 명은 검은 뿔테 안경을 낀 애다. 일찍 도착해서 미리 엎드려 자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월, 수, 금 3일은 1교시가
방송 수업인데, 방송 수업은 다음 주부터 시작한다고 해서 수요일은 그냥 자습이었다. 결국 오늘도 자습이란 얘기였다. 지금
자면 거의 두 시간 가까이 수면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 나도 잠을 잘까… 하는 생각을 하다 손에 들려 있는 AM7을 보고
'이것만 읽고 자야지'로 생각을 바꿨다. 전철역 앞의 무가지는 아침 시간의 여유로운 휴식을 위한 지참물이었다.
대충 기사들을 훑고, 만화까지 볼 때쯤 되니 교실이 거의 다 차 갔다. 선착순으로 앉도록 하다 보니 일찍 오는 애들이
앞자리를 차지하고, 늦게 오면 뒷자리는 고사하고 아직도 어색한 같은 반 애한테 '옆자리 가방 좀 치워줄래?' 하면서 자리에
앉아야 했다. 덕분에 애들의 등원시간은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일찍 자리를 잡았던 나는 여유롭게 신문을 덮고 자리에 엎드려
아침잠을 청했다.
4교시 시간표는 언어C였다. 언어A는 종합편, 언어B는 문학편, 언어C는 비문학편이라고 했다. 친구가 말했던 그 선생님이다.
한 과목 한 과목, 수업을 들을 때마다 학교 수업과는 다른 내공을 느끼고 있었지만 친구가 그토록 칭송(?)하는 선생님이라
어떨지 기대되는 마음이 컸다. 수업 종이 치고, 아이들은 자리에 앉고, 교실은 잠잠했다. 짧은 정적을 깬 것은 역시 선생님이었다.
두툼한 프린트 뭉치를 들고 나타난 선생님은 이마의 땀을 닦고 교단 위에 섰다.
''반갑습니다, 최진헌입니다.''
그러고는 고개를 푹 숙여 인사하셨다. 예측하지 못한, 뭔가 당황스러운 선생님의 인사법에, 얼떨결에 박수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선생님은 허허 웃으시며 프린트를 학생들에게 나누어주고, 교실 전체를 앞부터 뒤까지 죽 훑어보셨다. 학생들의
눈들은 선생님의 입을 향하고 있었다.
''이 반은 분위기가 아주 좋네요. 네, 좋습니다. 백 개가 넘는 눈이 저한테 와서 꽂힐 때 강사로서의 책임이 느껴지곤 합니다.
올 일 년을 함께 할 텐데 처음부터 예감이 좋군요. 잘 부탁합니다.''
수업이 아닌, 프레젠테이션이랄까 혹은 연기를 앞둔 체조선수와 같이 활기 넘쳐 보이는 모습이었다.
''자, 우선 한 장짜리 프린트를 먼저 봐 주세요. 올 한 해의 커리큘럼입니다. 제가 비문학을 맡았죠? 먼저 지금까지의 기출
문제를 분석합니다. 그걸 5월 초까지 끝내요. 약 한 10주 정도 되는 과정이지요. 그 다음은 이제 교육청이나 EBS 문제를 가지고
배운 내용을 직접 적용시킬 겁니다. 그게 7월까지 할 일이구요. 그 다음에는 방학이 있죠? 방학이 끝난 다음에는 진짜 수능을
대비한 실전 문제를 할 거에요.
그래서 우리가 수업할 게 뭐냐, 하면 독해법이라는 거예요, 독해법. 고삼 때 비문학을 어떻게 풀었는지 생각나십니까?
보통은 글을 그냥 읽고 문제를 그냥 풀죠. 아니면, 이건 제가 고등학생들을 가르쳐 보고 목격했던 건데, 문제를 풀라고 하면
일단 문제부터 열심히 읽어요. 거기에서 뭔가 힌트를 얻고 그걸 통해서 지문을 읽으려고 하는 거예요. 물론 지문과 문제가 서로
상호작용하는 부분도 있고 서로 참고를 하면서 머릿속의 생각을 완성해야 하는 게 맞는데, 이게 문제가 뭐냐면 결국은 지문 보고
문제 보고 결국 때려 맞추는 것 밖에 안 되거든요? 요즘 평가원의 출제 트렌드라는 걸 살펴보면 점점 이런 식의 때려 맞추는
독해를 하지 못하도록, 흔히 하는 말로 낚이도록 문제를 교묘하게 꼬고 있어요.
결국 중요한 건 우리가 글을 충분히 이해하는 거, 이거죠. 그래서 우선 이 기출 분석 부분에서는 평가원이 출제하는 지문의
쓰기 방식에 초점을 두고 문제보다 지문 독해 위주로 수업을 진행할거에요. 그럼, 모두 열심히 해 봅시다.''
점심시간과 오후 수업은 밋밋하게 지나갔다. 친구는 또 4교시 수업에 대해서 얘기했다. 그새 알게 된 반의 다른
애들하고도 그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솔직히 그 선생님은, 여태껏 봐 온 선생님들과는 뭔가 달랐다. 빡빡한 시간표와
고된 연구로 인한 학원 강사 특유의 피로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생기가 넘쳐보였다. 그 생기로 학생들을 기대하게 하고
휘어잡게 하는, 그런 힘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딱히 말을 걸 만한 애들이 없어서 그냥 조용히 교재나 뒤적거렸다. 나는 사흘째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7열짜리
책상 줄 중 3열, 앞에서 세 번째 자리였다. 가운데 한 자리를 비우고 건너편에 앉은 여자애 역시 사흘째 같은 그 자리를
고수하고 있었다. 키가 크고 말없이 생긴 애였다. 사흘째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보는 사이였지만 딱히 친해져야겠다는
생각, 그런 것도 없었다. 재수할 때는 가능한 조용히 공부하는 것이 좋다는 게 나의─그리고 많은 재수생들이 이맘때 가지는
─생각이었다.
선행반이었던 애들끼리는 얘기하는 모습이 간혹 보였지만, 아직도 웬만한 애들끼리는 거의 말을 하지 않고 지냈다.
아무래도 자리가 고정석이 아니다 보니, 매일매일 앉는 자리가 다를 수밖에 없고 말을 틀만한 환경이 조성되지 않는 것 같았다.
물이나 마실까 하고 쉬는 시간에 복도에 나가보면 9반 앞은 시끌벅적했다. 벌써 다들 고등학생들처럼 몰려다니는 것 같았다.
구석 쪽에 있는 10반은 반 안에서만 노는 것 같았고, 우리 반은 잠잠했다.
자습 시작을 몇 분 남겨놓고, 사물함에서 공부할 책을 꺼냈다. 우리 반의 사물함은 문 앞으로 나오자마자 있고, 또 복도를
걸어가서 9반 앞에 또 있었다. 내 사물함은 9반 쪽에 있는 사물함이었다. 여전히 그 앞은 잡담을 나누는 애들로 북적거렸다.
교실로 돌아오자마자 소리는 벽에 막혀 아득하게 들렸다. 사십 명 정도가 교실에 남아있는 것 같았다. 여전히 많은 수지만 수업
때보다는 뭔가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오늘 역시 수리를 중점적으로 공부하고, 외국어 숙제를 병행하기로 했다. 수리는 선생님이 총 네 분이 들어오셔서 교재도
네 권이었다. 자연스럽게 숙제는 쌓이기 마련이었다. 내 목표는 숙제와 문제집 풀이를 합쳐서 하루에 수리 50문제를 달성하는
것이었다. 지난 3일 간은 50문제를 조금 넘게 풀었다. 순조로운 출발이었다. 생각보다 할 만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고3 때 풀던
메가스터디 1000제가 생각났다. 그 때 분명 4백 몇 번 대에서 풀기를 관뒀다. 아마 수포자의 늪에서 완전히 헤어 나오지 못한
여파였을 것이다. 하지만 재수까지 하는 마당에 수리를 피하는 건 비겁한 일이었다. 올해는 어떻게든 작년의 설욕을 하고 싶었다.
놀랍게도 재수를 시작한 지 며칠 되지 않았는데도, 생각보다 수리 문제가 잘 풀렸다. 2009학년도 수리 나 형 문제를 다시 프린트해서
풀어봤는데 희한하게 작년 수능 시험장에서 느꼈던 그 막막함이 덜했다.
눈을 감고 작년의 수리 영역을 생각해봤다. 시험지를 나누어주고, 인쇄 상태를 확인해 보라고 했을 때, 그 때 이미 느꼈다.
8페이지짜리 시험지를 앞뒤로 넘겨보는 것만으로도 내가 이 시험은 어떻게 할 수가 없구나 하는 걸 알았다. 진땀이 났다. 아직도
기억한다. 7페이지 25번 문제. 직사각형 모양의 잔디밭에 산책로가 만들어져 있다. 이 산책로는 그림과 같이 반지름의 길이가
같은 원 8개가 서로 외접하고 있는 형태이다. 나에게 잔디밭이나 원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 눈에 보이는 건 그 원들 사이
어딘가에 아른아른 떠다니는, '70점' 이라는 글자였다. 날고 기어도 그 벽을 넘을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6월 평가원에서 60점을 받았다. 9월 평가원에선 약간 오른 73점을 받았다. 등급은 같았고 백분위도 달라지지 않았다. 단지
시험이 조금 더 쉬워졌을 뿐이었다. 혹은 학생들이 조금 더 적응한 것일지도 몰랐다. 10월 교육청 모의고사에서는 85점을 받았다.
수리 영역 1등급. 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10월 모의고사는 자살방지용이라고, 쉽게 내는 거라고들 했지만 자신감이 붙었다.
교내 꼴통의 막판 역전극을 이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기적은 없었다. '재수는 하는 것이 아니라 오는 것이다'라는 말의
의미를 그 때 알았다. 시험이 끝나고 채점한 결과는 더도 덜도 말고 딱 70점이었다.
오늘 푼 2009학년도 수리 나 형의 점수는 80점대였다. 가망이 있어보였다. 열 달은 충분했다. 재수를 시작하기 전 봤던
메가스터디 입시설명회 영상이 떠올랐다. 손주은 대표가 수리 9등급짜리 학생을 1등급으로 만들었던 얘기. 나의 목표는 수리
2천 문제였다. 하루 50문제면 두 달 정도에 달성할 수 있는 양이었다. 모든 단원과 모든 난이도를 포함한, 폭넓은 양치기를 시작했다.
사실 우리 반의 수리 수업은 꽤 어려웠다. 담임선생님을 비롯해서 선생님들이 모두 이과 수업만을 하시다가 처음으로(혹은
간만에) 문과 수업을 들어오셨기 때문에, 선생님들이 기대하는 학생들의 수준이 좀 높은 것 같았다. 물론 철저히 문과 수준에서
설명해주시는 황성록 선생님 같은 분도 있었지만, 선생님들의 설명을 들어보면 뭔가 많이 돌아 돌아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고등학교 수학인 이상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고3 때 학교에서 특작으로
수업하던 시절, 멀뚱멀뚱 풀이 과정만 베껴 적고 중간고사를 위해 닥치고 외웠던 그런 과정을 반복할 수는 없었다.
한 주의 끝. 재수학원이라는 새로운 환경의 첫 주는 낯설었다. 성인이 되어 최초로 경험한 것은 꿈을 향한 낭만적 계획과 삶이
아닌 고등학교보다 더 좁은 교실, 더 많은 사람들과 부대껴 공부하는 것이었다. 그 곳에는 색깔이 없었다. 모두가 칙칙한 무채색이었다.
현란한 색깔을 뽐내는 건 오직 삼색의 분필과 해가 갈수록 더욱 화려해지고 비싸지는 문제집들뿐이었다.
공부는 힘들지 않았다. 열 시간이 넘도록 앉아 있는 것도, 수많은 글자, 숫자, 영어 단어와 씨름하는 것도 생각보다 어렵지 않아서
놀랐다. 마치 구도(求道)하는 것 같았다. 나를 힘들게 하던 모든 것이 사방 십 미터가 안 되는 그 공간에서는 느껴지지 않았다. 날
힘들게 하던 짝사랑도, 도저히 먹을 맛이 안 나던 점심 도시락도, 생각만 해도 기분 나쁜 사람들도, 이 고행의 최종 목적지인 대학까지도.
하지만 조금만 정신을 풀어두면 힘이 빠지면서 허탈했다. 나는 왜 이러고 있는 걸까?
뭔가 제때 올라야 할 계단을 오르지 못하고 정체되어 있는 느낌, 똑같은 쳇바퀴를 다시 한 번 도는 그 느낌이 스무 살의 나라는 정체성과
충돌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재수, 재수생이라는 단어가 전과는 아주 다르게 느껴졌다. 직접 경험하고 있는 재수 생활이 실감나지 않고
뭔가 붕 뜬 느낌이었다. 재수하는 나를 다른 내가 관찰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이런 나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재수하는 나로부터 거리를 두기 위한 무의식적인 작용일 지도 몰랐다. 하지만 현실은 현실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나는 재수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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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작성자 UNSEEN입니다.
2편 업로드 이후 '3편은 언제 올라오느냐'는 쪽지를 많이 받았습니다. 보잘것 없는 글에 많은 관심을 보여주셔서 황송할 뿐입니다.
최근 일자리를 구해서 일하느라 글에 많이 소홀했습니다. 원래 하루 한 편을 목표로 쓰는 글이었지만 할 일이 생기니
자꾸 늦어지게 되었네요. 제가 곧 일본에 가게 되서 4편은 빨라도 다음주 주말쯤에야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르비에서의 줄맞춤이나 줄간격 때문에 불편함을 느끼시는 분께서는
(고해상도 모니터에서의 가독성을 위해 1024×768 에 딱 맞도록 줄을 끊고 있습니다)
제 블로그 http://foen.pe.kr 에서 문장부호와 줄간격을 보기 좋게 정렬한 원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읽어주시는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0 XDK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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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술 인강 질문이요 5 0
논단기 프리패스가 싸길래 구입했는데요, 막상 구입하고 나니 안좋은 소문이 많은거...
오옷 ...드디어 3편이 나왔군요. 잘읽었습니다.
근데 4편까지 기달리려면.. 열흘을 기달려야 되는군요 ㅠㅠ
드디어 나왔구나!! 왠지 이 글 출판 제의 들어올듯 하네요 ㅎㅎ
선 댓글후감상 ㅋㅋ
정말 좋은 글 감사합니다.
기다리고있었어요 ^-^ 잘읽었습니다 ㅎㅎ
글 잘 쓰시네요...
묘사도 잘하시고..
기억력도 좋으신듯 ㅎㅎ
잘 읽구있습니다~ㅎㅎ
잘 읽고 있습니다!
잘 읽고잇어여 !!
너무 좋아요~
글은 잘쓰시는데도 허세가 없는 담백함. 좋아요 ㅠㅠ
마치 소설을 읽듯.ㅎ.ㅎ.ㅎ 계속 달아주세요^^
예전에 읽었던 '소나무'님의 수기와 같은 좋은글을 수기게시판에서 또 볼수있겠네요.
좋은 수기네요 정말!!!!!!! 이제 재수를 시작하는 사람으로써 많을것을 생각하게 하는 수기..